"그때를 위한 빛"이 주어질 때, 그것은 "받아들여지거나" 혹은 "거절된다." 그 빛이 제시될 때 이루어지는 분리는 영원한 복음의 사역으로, 그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인침뿐만 아니라 알곡과 가라지의 분리를 포함한다. 최종적인 시험과 분리의 과정은 9/11에 시작되었는데, 그때 예언적 질문은 "얼마 동안?"이고, 예언적 대답은 "일요일 법까지"이다. "얼마 동안"이라는 상징에 대한 마지막 언급은 요한계시록의 다섯째 인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가 다섯째 인을 떼셨을 때,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지닌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을 보았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쳐 말하였다. “거룩하고 참되신 주여, 땅에 사는 자들을 언제까지 심판하지 않으시며 그들에게 우리의 피를 갚아 주지 않으시려나이까?”

그리고 그들 각 사람에게 흰 두루마기를 주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아직 잠시 동안 쉬되, 그들의 동무 종들과 형제들 중에서도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할 자들의 수가 차기까지 하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6:9-11.

영감은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이 던진 ‘얼마나 더’라는 질문에 대한 답을, 교황권으로 인해 순교한 자들의 두 번째 무리가 이루어질 미래에 둔다. 그것은 일요일 법령에서 시작되며, 이 때문에 화잇 자매는 요한계시록 18장을 그 두 번째 순교자 무리의 성취로 규정한다. 처음 다섯 절에는 두 개의 ‘음성’이 있는데, 첫 번째 음성은 9/11을 가리키고 두 번째 음성은 일요일 법령 때 바벨론에서 남녀를 나오라고 부른다. 화잇 자매는 다섯째 인의 ‘얼마나 더’라는 상징을 요한계시록 18장 처음 다섯 절과 연관시켜 9/11에서 일요일 법령까지의 윤곽을 제시한다. 초점은 하나님의 백성의 분리와 인침이 아니라, 과거 역사 속 순교자들과 일요일 법령 위기 동안 생겨 교황권에 의해 순교한 자들의 두 번째 무리를 이루게 될 순교자들을 살해한 죄에 대한 교황권의 심판에 있다.

"다섯째 인이 열렸을 때, 사도 요한은 환상 중에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 때문에 순교한 자들의 무리를 보았다. 그 뒤에 신실하고 참된 이들이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부르심을 받는, 요한계시록 18장에 묘사된 장면들이 이어졌다. [요한계시록 18:1-5, 인용.]" Manuscript Releases 20권, 14쪽.

그녀가 다섯째 인의 순교자들과 주일법 위기 속에서 형성될 미래의 두 번째 순교자 무리를 지목하는 다른 본문에서, 그녀는 그 장면들이 “미래의 어느 기간에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요한계시록 18장의 두 음성은 그 “미래의 기간”을 나타낸다. 첫째 음성은 처음에는 9/11에서, 둘째 음성은 주일법에서.

'그가 다섯째 인을 여셨을 때, 나는 제단 아래에서 하나님의 말씀과 그들이 간직한 증언 때문에 죽임을 당한 자들의 영혼들을 보았다. 그들이 큰 소리로 외쳐 이르되, 오 주여, 거룩하시고 참되신 이여, 땅에 사는 자들에게 우리의 피를 심판하여 갚아 주지 아니하시기를 어느 때까지 하시나이까? 하니, 그들 각 사람에게 흰 옷이 주어졌고 [그들이 정결하고 거룩하다고 선언되었다]; 또 그들에게 이르시되, 아직 잠시 동안만 쉬라, 이는 그들과 같이 죽임을 당할 그들의 동료 종들과 형제들도 채워지기까지라 하시더라' [요한계시록 6:9-11]. 여기서 요한에게 제시된 장면들은 현실이 아니라, 장차 미래의 어느 때에 있게 될 것들이었다.

"요한계시록 8장 1-4절 인용됨." Manuscript Releases, 제20권, 197쪽.

엘렌 화잇은 두 번째 순교자 무리의 형성이 성취될 때를 미래와 연결시키며, 또 다른 대목에서는 요한계시록 18장 1–5절을 인용하는데, 거기서 처음 세 절에는 한 음성이, 4절과 5절에는 또 다른 음성이 나타난다고 밝힌다. 첫 번째 음성은 뉴욕의 거대한 건물들이 무너진 9·11을 가리키고, 두 번째 음성은 하나님의 다른 양 떼가 바벨론에서 나오라는 부름을 받는 일요일 법령의 때이다. 두 번째 대목에서 그녀는 요한계시록 8장과 그 첫 네 절을 언급하면서, 그것이 일곱째 인의 개봉을 가리킨다고 한다. 그때 제단에서 취한 불이 땅에 던져지는데, 이는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자들을 밝히던 오순절과 일치하며, 엘리야의 열두 돌이 빛났던 것처럼, 제자들 위에 나타난 불의 혀들로도 표현된다.

얼마나 오래? 스가랴와 요한

‘얼마나 오래’는 9/11부터 주일법에 이르기까지의 기간을 가리키는 예언적 상징이며, 이는 갈멜산 이야기, 1840년부터 1844년까지의 밀러주의자들의 역사, 모세의 역사에서 여덟째 재앙부터 열째 재앙까지, 그리고 다섯째 인 아래 순교자들의 증언에서 예표되어 왔다. 또한 스가랴서는 바벨론에 칠십 년 동안 있던 예루살렘에 하나님이 긍휼을 베푸시기까지 ‘얼마나 오래’일지를 묻는다.

그때에 여호와의 천사가 대답하여 이르되,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서 이 칠십 년 동안 진노하신 예루살렘과 유다의 성읍들을 어느 때까지 긍휼히 여기지 아니하시겠나이까?

그리고 주님께서 나와 말하던 천사에게 선한 말씀과 위로의 말씀으로 대답하셨다.

나와 말하던 그 천사가 내게 이르되, 너는 외쳐 이르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큰 질투로 예루살렘과 시온을 위하여 질투하노라. 안일한 이방 민족들을 내가 심히 노하였나니, 이는 내가 조금만 분노하였으나 그들이 환난을 더하였음이라. 그러므로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내가 긍휼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나니,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 집이 그 가운데에 건축될 것이요, 측량줄이 예루살렘 위에 또 펴지리라. 다시 외쳐 이르라. 만군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나의 성읍들이 번영으로 말미암아 다시 널리 퍼질 것이요, 여호와가 다시 시온을 위로하시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시리라. 스가랴 1:12-17.

화이트 자매는 문자적 고대 이스라엘이 문자적 바벨론의 속박 아래 있었던 스가랴의 ‘예순과 열, 곧 칠십 년’을 538년부터 1798년까지 영적 이스라엘(그리스도인들)이 영적 바벨론(로마 가톨릭교)의 속박 아래 있었던 1,260년과 직접적으로 일치시킨다.

"지상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는 이 오랜 기간의 가차 없는 박해 동안, 유배 기간에 바빌론에서 포로로 잡혀 있었던 이스라엘 자손들이 그랬던 것과 마찬가지로, 실로 포로 상태에 있었다." Prophets and Kings, 714.

1798년에, 1,260년의 끝에 요한계시록 14장에서 천사들로 상징된 세 기별 중 첫째 기별이 임했다. 둘째 기별은 1844년 4월 19일에, 셋째 기별은 1844년 10월 22일에 임했다. “얼마나 오래”라는 질문으로 상징된 역사는 9/11부터 일요일 법령까지이며, 그 기간은 재림주의의 시작에서, 곧 1840년 8월 11일부터 1844년 10월 22일까지의 밀러 운동에서 예표되었다. 그 기간은 요한계시록 10장에서 사도 요한이 작은 책을 먹을 때 입에는 달았으나 배에서는 쓰게 된 장면으로 상징적으로 묘사된다.

내가 하늘에서 들은 그 음성이 다시 내게 말하여 이르되, ‘가서 바다와 땅 위에 서 있는 그 천사의 손에 펼쳐져 있는 작은 책을 가져가라’ 하였다.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그에게 말하기를, ‘작은 책을 내게 주십시오’ 하니, 그가 내게 이르되, ‘가져다가 먹어라. 그것이 네 배는 쓰게 하겠으나 네 입에서는 꿀같이 달 것이다’ 하였다. 내가 천사의 손에서 작은 책을 받아 먹었더니, 그것이 내 입에서는 꿀같이 달았으나, 다 먹자마자 내 배는 쓰게 되었다.

그가 내게 이르되, 네가 많은 백성과 나라와 방언과 왕들 앞에서 다시 예언하여야 하리라. 요한계시록 10:8-11.

요한이 묘사하고 있는 역사는 먹은 책으로 상징되는데, 그 먹는 행위는 밀러주의자들이 그 메시지를 이해하고 그 메시지를 선포하는 과정에서의 그들의 경험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그 역사가 제시된 직후 요한에게 다시 예언해야 한다고 말해질 때, 여기서 가리키는 예언은 1840년부터 1844년까지의 역사이다. 요한은 1840년부터 1844년까지의 밀러주의자들의 역사가 재림주의의 종말의 역사에서 반복된다고 들었다. 요한은 다시 예언해야 한다는 말을 듣자마자 성전을 측량하라는 지시를 받는다.

또 내게 지팡이 같은 갈대 하나가 주어졌고, 천사가 서서 말하였다. “일어나 하나님의 성전과 제단과 그 안에서 경배하는 자들을 측량하라. 그러나 성전 밖에 있는 뜰은 내버려 두고 측량하지 말라. 이는 그것이 이방인들에게 주어졌기 때문이다. 그들이 거룩한 성을 마흔두 달 동안 짓밟을 것이다.” 요한계시록 11:1, 2.

1844년 10월 22일 이후 재림운동에 주어진 사역은 요한에 의해 성전을 측량하거나 건축하는 일로 묘사되었는데, 이는 스가랴서에 제시된 “줄이 다시 예루살렘 위에 펼쳐질 것”이라는 약속과 일치한다—주께서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재림운동의 시작에서 밀러파 재림운동의 빌라델비아 운동으로 표상된 역사는, 재림운동의 끝에서도 십사만 사천의 빌라델비아 운동으로 반복된다. 1844년 10월 22일의 대실망 때, “일곱째 천사의 음성의 날들”로 표현된 한 기간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일곱째 천사의 소리가 나기 시작하는 때에, 그가 그의 종들인 선지자들에게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비밀이 이루어지리라. 요한계시록 10:7.

이슬람의 둘째 화에 관한 시간 예언이 1840년 8월 11일에 밀러주의자들이 미리 예측한 그대로 성취되었을 때, 그 기별은 밀러주의자들에게 달콤했다. 그 기별은 1844년 10월 22일의 대실망 때 배에서 쓰게 되었다. 요한이 1840년부터 1844년까지의 역사를 보여 주는 일을 마치자마자, 그는 똑같은 일을 다시 해야 한다(예언하라)는 통지를 받는다. 이어 그는 예루살렘을 측량하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함으로써 주께서 예루살렘을 택하신다는 스가랴의 예언과 부합하게 된다. 1844년 10월 22일 이후로 예언의 역사는 "일곱째 천사의 음성의 날들"로 표현된다. 일곱째 천사(셋째 화)의 기별(음성)의 "날들"은 그리스도의 신성이 장차 144,000이 될 사람들의 인성과 영구적으로 결합될 한 기간을 가리킨다. 그 일은 1863년의 반역으로 인해 지연되었고, 9/11에 일곱째 천사(셋째 화)의 나팔 소리가 다시금 울리기 시작했다.

거룩한 역사에서 주께서는 자신의 이름을 두시려고 예루살렘을 택하셨고, 그의 ‘이름’은 그의 성품이다. 스가랴는 “나는 큰 질투로 예루살렘과 시온을 위하여 질투한다”고 말하고, 이어 “주께서 다시 시온을 위로하시며 다시 예루살렘을 택하실 것이다”라고 말한다. 시온은 ‘위로자’이신 성령을 받을 때 위로를 받는다. 성령의 위로하심은 부활 후 아버지를 만나 뵙고 내려오신 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에게 숨을 내쉬신 것에 부합하여 9/11에 시작되었다. 성령의 나타나심은 오순절에 크게 증대되었다. 그 시기는 첫 열매 예물이 부활함으로 시작되었고 오순절의 첫 열매 예물로 끝났으며, 그때 온 세상이 그 메시지를 들었다.

너희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너희는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하라. 예루살렘에게 위로의 말로 말하고, 그에게 외쳐 이르라. 예루살렘의 전쟁이 끝났고, 그 죄악이 사함을 받았나니, 이는 그 모든 죄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손에서 갑절을 받았음이라. 이사야 41:1, 2.

십사만 사천은 ‘그들의 죄악이 사함을 받을 때’ 인침을 받는다. 이는 그들이 오순절에 제자들이 예표한 바와 같이 한량없는 성령의 부어주심을 받으면서 오순절의 첫 열매 헌물로 들어 올려질 때, 일요법령 직전에 일어난다. 9/11에 시작된 비의 뿌림은 일요법령에서 충만한 부어주심이 된다. 역사 속에서는 9/11의 첫 열매 헌물에서 시작하여, 십사만 사천이 인침을 받고 헌물로 준비되어 일요법령부터 은혜의 시기의 종결까지 기치로 들어 올려지게 되는 일요법령 때의 첫 열매 헌물에 이른다. 그 역사는 바벨론의 몰락을 선포하는 요한계시록 18장 처음 세 절로 대표되며, 바벨론은 ‘배가됨’을 나타내는 성경적 상징이다.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다른 한 천사가 큰 권세를 가지고 하늘에서 내려오는데, 땅이 그의 영광으로 환하여지더라. 그가 힘찬 음성으로 크게 외쳐 이르되, “큰 바벨론이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귀신들의 거처와 각종 더러운 영의 소굴과 각종 부정하고 가증한 새의 우리가 되었도다. 이는 모든 민족이 그 음행으로 인한 진노의 포도주를 마셨고,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이 그의 사치의 풍성함으로 말미암아 치부하였기 때문이라.” 요한계시록 18:1–3.

성경 전체에 걸쳐 구절이나 단어의 반복은 마지막 때에 있을 바벨론의 몰락이 완전하게 성취됨을 나타낸다. 이는 언제나 어떤 것의 끝을 그 시작으로 보여 주시는 알파와 오메가의 표징이다. 바벨론의 두 번의 몰락은 니므롯과 벨사살로 대표된다. 니므롯은 바벨론의 시작이었으며, 그때는 단지 바벨이었다. 니므롯의 몰락은 벨사살의 몰락을 대표했으며, 둘째 천사와 요한계시록 18장의 천사의 메시지는 바벨론의 처음에 있었던 니므롯의 몰락이 마지막에 있을 벨사살의 몰락을 대표했다는 것이다. 이는 알파와 오메가가 언제나 어떤 것의 끝을 그 시작으로 보여 주시기 때문이다.

니므롯의 탑은 그의 몰락을 상징하여 무너졌고, 그는 9/11의 트윈 타워 붕괴를 예표했다. 벨사살의 몰락은 벽에 쓰인 글이었고, 그것은 성경 예언의 첫째 왕국인 바벨론의 칠십 년 통치의 종말을 알리는 것이었으며, 따라서 이사야 23장의 상징적 "한 왕의 날수대로 칠십 년"이 1798년부터 주일법에 이르는 미국의 역사를 대표하는 것으로서, 그 기간의 끝에서 일어날 미국의 몰락을 예표했다. 벨사살의 벽에 쓰인 글은 주일법 때 정교 분리의 장벽이 무너지는 때를 나타내는데, 그 지점이 바로 성경 예언의 여섯째 왕국이 끝나는 때이며, 마치 바로 그 밤에 벨사살이 죽임을 당한 것과 같다. 벽에 쓰인 글은 헌법의 정교 분리의 장벽을 뒤엎도록 쓰여지는 법을 가리킨다.

9/11부터 주일법에 이르고, 그 이후 인류의 은혜기간이 종료되고 마지막 일곱 재앙에까지 이르는 ‘역사’는, 하나님의 말씀 안에서 구절이나 단어의 이중 표현으로 상징되는 역사적 기간이다. 그 기간 동안 성령이 부어지는데, 9/11부터 주일법까지는 뿌림으로 시작되고 그 이후에는 충만히 부어진다. 성령은 그리스도께서 "보혜사"로 나타내신 분으로, 그가 오실 때 하나님의 백성에게 모든 것을 알게 하실 것이다.

그러나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요한복음 14:26.

성령은 "황금 기름", 곧 "비"이며 또한 "보혜사"로서 십사만 사천인에게 전달된다. "보혜사"로 표현될 때, 성령은 성령의 특별한 현현을 지칭한다.

하나님의 백성은 복음의 요구를 충족할 때마다 언제나 성령을 받아 왔다. 그러나 예전과 같이 진정한 거룩한 부흥의 때, 곧 공동체 전체를 위한 성령의 특별한 나타나심이 있을 때에는 성령은 보혜사로 나타나신다. 더 중요한 것은, 보혜사께서 그들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실 때 그 공동체의 기억이 일깨워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그 나타나심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진정한 체험을 하고 있음을 확인시켜 준다. 왜냐하면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면서 그들의 마음의 활동에 참여하시고, 그들의 사고 과정에 영향을 미치고 계시기 때문이다.

인간의 기억은 판단력, 지성, 이성, 양심 등과 같은 다른 요소들과 결합하여 인간의 고등한 본성을 이루며, 이를 사도 바울은 ‘마음’이라고 부른다. 이 고등한 본성은 육신의 마음이거나 그리스도의 마음이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하나님의 법에 복종하지 않을 뿐 아니라 복종할 수도 없다. 로마서 8:7.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 고린도전서 2:16.

낮은 본성, 곧 육체는 감각과 연관된 신경계, 감정 체계, 그리고 호르몬계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감각들은 ‘영혼의 통로’이다. 높은 본성은 낮은 본성을 다스리도록 고안되었고, 그래서 요새로 표현된다. 그리고 그 요새는 감각(낮은 본성)으로부터 끊임없이 공격을 받으며, 그 공격은 요새로 들어가는 통로들을 통해 가해진다. 높은 본성의 요새 안에는 지휘본부, 곧 화이트 자매가 ‘성채’라고 부르는 곳이 있다. 그 성채는 성소에서 지성소에 해당하며, 성소는 기본적으로 두 부분으로 나뉜다. 뜰은 육체, 곧 낮은 본성에 해당하고, 뜰로 들어오거나 피를 성소로 옮기려면 휘장을 통과해야 했다. 뜰은 휘장들로 양끝이 막혀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성별하신 새롭고 살아 있는 길로, 휘장 곧 그의 육체를 통하여. 히브리서 10:20.

성소 전체는 두 부분, 곧 뜰과 성소로 나뉜다. 그 성소는 다시, 고등한 본성이 그러하듯이, 두 부분으로 나뉜다. 고등한 본성도 두 영역으로 구분된다. 그 두 영역 가운데 하나는 성소로, 다른 하나는 지성소로 상징된다. 성소는 인류가 기능하기 위해 필요한 정신적 활동을 상징하지만, 지성소는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영역이다. 지성소는 하나님의 보좌가 있는 곳이며, 회심한 자들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에 앉히심을 받는다.

또 우리를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히셨다. 에베소서 2:6.

그 구절은, 같은 생각의 흐름 속에서 몇 절 앞부분에서 예수께서 그의 백성들과 마찬가지로 하늘에 앉아 계신다고 말하는 본문에서 나온 것이다.

그가 그리스도 안에서 행하신 것, 곧 그를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시고 하늘에 있는 곳에서 자신의 오른편에 앉히신 것이다. 에베소서 1:20.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은 지성소에 함께 앉아 있다. 그리스도께서는 부활하신 뒤 하늘에 앉으셨고, 그의 백성도 일으킴을 받아 지성소의 보좌가 있는 곳에 앉혀져 있다. 바울은 6절에서 일으킴을 받은 자들이 앞절에서 죄에서 살아나게 된 자들이라고 밝힌다.

우리가 죄 가운데 죽어 있었을 때에도 그리스도와 함께 우리를 살리셨고(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 또한 우리를 함께 일으키시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늘에 함께 앉히셨다. 에베소서 1:5, 6.

에베소서의 그 구절이 완전하게 성취된 모습은 요한계시록 11장 11절의 두 증인이다. 그들은 부활하여 표징으로 하늘로 들려 올라갈 뿐 아니라 하늘에 앉혀진다. 지성소에서 그 두 증인은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인류를 대표하고 있으며, 그들이 거기에 앉아 있을 정당성은 그들 각자가 지닌 표장에 근거한다. 그 표장은 하나님의 인이며, 하나님의 인은 인간이 신성과 하나가 되었음을 나타낸다. 그리고 그 인은 보혜사이신 성령께서 ‘그들’의 더 높은 본성의 지성소 안에 거하신다는 사실로 표현된다. 지성소는 신성과 인간이 결합되는 하나님의 보좌실이며, 신성과 인성이 함께 앉아 있는 지성소를 포함하는 인간 성전의 높은 본성을 나타낸다.

“보혜사”의 부어주심은 십사만 사천의 인침이며, 그것은 구원의 역사에 변화를 알리는 것이다. 그때 교회는 전투하는 교회에서 승리한 교회로 바뀐다. 그때에는 십사만 사천의 라오디게아 운동에서 십사만 사천의 빌라델비아 운동으로 바뀐다. 그때에는 일곱째 교회의 경험에서 여섯째 교회의 경험으로 바뀌는데, 여섯째 교회는 밀러주의자들이었다. 밀러주의 운동에 의해 성취된 빌라델비아, 곧 여섯째 교회의 예언적 특징은 그것이 결코 교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화이트라는 두 사람이 모두 그 운동을 라오디게아로 규정한 1856년까지 그것은 오직 운동이었을 뿐이었다. 7년 후에 법적으로 조직된 교회가 설립되었다.

일요일 법령에서의 구원의 변화는 그리스도의 대제사장으로서의 취임을 표시한 오순절의 구원의 변화로 예표되었다.

오순절 성령의 부어주심은 구속주의 취임이 이루어졌음을 알리는 하늘의 선언이었다. 그의 약속대로 그는 하늘로부터 성령을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보내셨다. 이는 그가 제사장이요 왕으로서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받으셨고 그의 백성 위에 기름부음 받은 자이심을 나타내는 표였다. 사도들의 행적, 38.

일요일 법령 때 십사만 사천에게 늦은 비가 한량 없이 부어질 때, 그것은 투쟁하는 교회가 끝나고 승리한 교회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하늘의 소식’이 될 것이다. 오순절에 하늘 성소에서 이루어진 그리스도의 취임은 일요일 법령 때 십사만 사천인이 받는 기름 부음을 예표한다.

“오순절”의 부어 주심은 그리스도께서 기름부음 받은 자이심을 밝히 드러냈으며, 하늘에서의 취임식에서 그분이 기름부음을 받으신 것을 상징했다. 그러나 그분은 또한 세례 때에도 기름부음을 받으셨다. 그분의 세례(9/11)에서 오순절(일요일 법령)에 이르기까지는, 세례 후 3년 반 뒤에 있었던 그분의 실제 죽음과 장사와 부활(초실절)에 의해 다시 한 번 표상된다. 그러므로 9/11은 그분의 세례에서와 또한 그분의 부활에서 표상된다. 그분의 상징적 부활과 문자적 부활은 각각 오순절에서 끝나는 두 개의 예언적 선의 시작을 표시한다. 두 역사 모두 첫 열매 제물의 부활로 시작한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으니,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죽은 자의 부활도 옵니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각각 자기의 차례가 있으니, 첫째는 첫 열매이신 그리스도요, 그다음은 그가 오실 때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입니다. 고린도전서 15:20-23.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부활에서 첫 열매 제물이 되심으로써, 오순절의 첫 열매 제물로 끝나는 "오순절의 시기"의 시작을 알리셨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보리이며, 밀은 "그 후에" "그의 재림 때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이다.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 "그 후에" 해당하는 자들은 "그의 재림 때 그리스도께 속한 자들"로서 세상 끝에 있을 신실한 영혼들의 마지막 추수를 나타내는데, 이는 오순절에 모여든 삼천 영혼으로 상징된다.

그 구절은 또한 죽음의 관점에서 부활을 다룬다. 죽음은 아담에게서 시작되어 모든 사람에게 임하지만, 그것은 ‘순서대로’ 그렇게 일어난다. 사도행전에서 베드로는, 그때 요엘서가 성취되고 있을 때, 위로자의 임재로부터 오는 새롭게 함의 때가 임할 때 죄가 지워지도록 사람들이 자기 죄를 미리 심판에 보내야 한다고 기록한다. 그때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지우기 위해 심판의 책들을 살피고 계신 것이 아니었는데, 심판은 1800년이 넘는 미래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각 사람은 자기 차례대로”라는 언급은 아담에서 시작되며, 따라서 회복의 때가 이를 때까지 아담 이후의 죽은 자들에 대한 심판을 가리킨다. 늦은 비가 오면 심판은 죽은 자들에게서 산 자들에게로 옮겨간다. 그 구절이 나타내는 기간(그리스도의 부활부터 오순절까지), 곧 보리의 첫 열매에서 밀의 첫 열매에 이르기까지, 산 자들의 심판 동안 비가 내리고, 비가 내림에 따라 그 비가 상징하는 기별이 밀과 가라지를 분리한다. 일요일 법령, 곧 오순절의 때에는 밀이 더 이상 가라지와 섞여 있지 않으며, 밀의 첫 열매로서 두 개의 요제 떡이 들어 올려진다. 9/11부터 일요일 법령에 이르기까지의 정결케 하는 과정은 말라기 3장에서 언약의 사자가 레위인들을 정결하게 하고 또한 연단할 때에도 나타나며, 그는 그것을 “불”로 행하신다. “불”은 오순절의 불의 혀들로 나타난 바와 같이 기별의 상징이다. 우리가 살피는 이 역사에서, 두 부류의 분리는 오순절의 첫 열매로 상징되는 두 개의 요제 떡, 곧 14만 4천을 산출하며, 그 떡은 죄의 표상을 포함한 유일한 제물이었기 때문에 철저히 구워져야 했다.

그 두 개의 요제 떡에는 누룩이 들어 있었고, 누룩은 죄의 상징이다. 그 누룩은 언약의 사자의 정련하는 불로 상징되는 바와 같이 화덕의 불에서 소멸되었다. 이사야는 27장에서 그가 “동풍의 날”이라 부르는, 9·11에 시작되는 논쟁을 지목한다. 그 본문은 이스라엘의 죄가 바로 그 논쟁을 통해 속죄됨을 가르친다. 그 “논쟁”은 참된 늦은비 기별과 존재하는 다른 모든 거짓 늦은비 기별들 사이의 것이다. 기별은 “불”이며, 그 “불”은 언약의 사자가 정결하게 하고 제거하는 데 사용하는 것이다. 늦은비 기별을 둘러싼 논쟁은 일요일 법령 때 들어 올려지는 오순절 첫 열매의 밀 제물에서 누룩을 제거한다. 십사만 사천은 오순절 첫 열매의 밀 제물로서, 그분의 피로 말미암는 칭의와 그들의 증언으로 인한 성화로 이기는 자들인데, 이는 비록 성화시키는 것은 말씀이지만 그 말씀이 기별로 전달될 때에만 그렇게 하기 때문이다. 기별의 제시는 십사만 사천이 살게 하고, 거짓 늦은비 기별의 제시는 죽음을 낳는다.

그들은 어린 양의 피와 자기들의 증언으로 그를 이겼고, 죽기까지 자기 생명을 아끼지 않았다. 요한계시록 12:11.

14만 4천 명은 그리스도께서 이기신 것처럼 이기는 데 있어 그리스도를 따르는데, 이는 예언적으로 그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기 때문이다.

이들은 여자와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한 자들이니 그들은 순결한 자들이다. 이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 이들은 사람들 가운데에서 속량함을 받아 하나님과 어린 양께 드려진 처음 익은 열매가 된 자들이다. 요한계시록 14:4.

요한계시록 14장 4절에서 14만 4천은 ‘첫 열매’로 불린다. 그들은 또한 ‘처녀들’로 불리며, 영감은 마태복음 25장의 열 처녀 비유가 재림교인들의 경험을 묘사한다고 우리에게 알려 주었다. 그들은 ‘처녀들’일 뿐만 아니라 ‘여자와 더불어 더럽혀지지 않았다’고도 하는데, 14만 4천을 낳은 시험과 분리의 과정이 14만 4천과 ‘모든’ 거짓 종교 사이에 구별을 만들어 냈기 때문이다. ‘이들’은 어린 양이 어디로 가시든지 그를 따르며, 첫 열매의 예물로서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장사와 부활에 있어서 그분을 따라야 한다.

요한계시록 11장 11절에서 기치로 높이 들려질 두 증인은 먼저 죽임을 당하고, 사흘 반 후에 그리스도처럼 첫 열매의 제물로 부활한다. 과거에도 지금도 그리스도이신 그 첫 열매의 제물에는, 라오디게아적 경험으로 인해 파산 상태에 있던 자들을 속량하기 위하여 언약의 피가 흘려지는 일이 포함되었다. 한 절(4절)에서, 14만 4천과 관련된 다양한 예언의 빛의 여러 줄기에 대한 이 모든 간략한 요약이 제시된다. 그리고 그것은 기묘한 수를 세시는 이 팔모니의 손에 의해 계시 144에 제시되어 있다. 성경에서 어떤 것이 배로 반복되는 것은 늦은 비의 역사를 나타내며, 늦은 비는 보혜사가 하나님의 백성 위에 부어지는 때요 장소이다.

산 위에서 기쁜 소식을 전하고 평화를 선포하며, 좋은 소식을 전하고 구원을 선포하고, 시온에게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고 말하는 자의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이 소리를 높여 한 목소리로 함께 노래하리니, 여호와께서 시온을 다시 회복하실 때 그들이 눈으로 직접 보게 될 것이다.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함께 기뻐 소리치며 노래하라.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기 때문이다. 여호와께서 모든 민족들의 눈앞에서 자신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셨으니, 땅끝까지 모든 사람들이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리라. 떠나라, 떠나라, 거기에서 나와라.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그 한가운데에서 나오라. 여호와의 기구를 메는 자들아, 스스로 깨끗하게 하라. 이사야 52:7-11.

시온 H6726은 H6725와 동일하며, 이는 ‘두드러짐의 의미; 기념비적이거나 길잡이가 되는 기둥: - 표징, 표제, 이정표’를 뜻한다. 시온은 십사만 사천의 기치를 상징하며, 본문에서 그들은 이미 화평의 기쁜 소식을 선포하고 전하였으므로 이미 늦은 비를 받았다. 그 사실만큼이나 구체적인 것은 그들이 ‘서로 눈을 마주 본다(eye to eye)’는 점으로, 이는 오순절의 제자들을 나타내니, 오순절 전 열흘이 하나 됨의 기간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께서는 ‘hath’(과거 시제를 나타냄)라는 표현 그대로, 기쁜 소식을 전하는 이들을 위해 이미 세 가지를 이루셨다. 곧 ‘자기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으며’, ‘모든 나라의 눈앞에서 자기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셨다’.

그분은 9/11에 자신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그로써 말라기 3장의 시험 과정의 시작을 알리셨다. 그 과정은 일요일 법령 때, 그분이 첫 열매 예물의 기치를 들어 올리실 때 마무리되는데, 이는 "모든 민족의 눈앞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드러내신다"는 것으로 나타난다. 그분은 14만 4천을 위로하시고, 구속하시며, 들어 올리신다. 9/11에 그분은 위로하시고 정결케 하는 과정을 시작하셔서 자신의 백성을 구속하시고, 이어 그들을 기치로 들어 올리신다. 말라기의 말대로, "옛날과 같이 유다와 예루살렘의 예물이 기쁨이 되도록."

그는 은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는 자처럼 앉아 레위 자손을 정결하게 하고, 금과 은처럼 그들을 연단하여 깨끗하게 하여, 그들이 의롭게 여호와께 제물을 드리게 하리라. 그때에 유다와 예루살렘의 제물이 옛날과 이전 해들과 같이 여호와께 기쁨이 되리라. 말라기 3:3, 4.

우리는 "얼마나 오래"에 대한 논의를 다음 글에서 마무리하겠습니다.

“‘손에 키를 들고 자기의 타작마당을 정하게 하사 알곡은 모아 곳간에 들이고.’ 마태복음 3:12. 이때는 정결하게 하는 시기들 가운데 하나였다. 진리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쭉정이가 알곡에서 분리되고 있었다. 많은 이들이 책망을 받아들이기에는 지나치게 허영스럽고 자기의에 차 있었으며, 겸손한 생애를 받아들이기에는 세상을 너무 사랑하였기 때문에 예수께 등을 돌렸다. 오늘날에도 많은 이들이 여전히 같은 일을 하고 있다. 가버나움 회당에 있던 그 제자들이 시험을 받았던 것처럼, 오늘날에도 영혼들이 시험을 받고 있다. 진리가 마음에 절실히 적용될 때, 그들은 자기들의 생애가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음을 본다. 그들은 자기 자신 안에 전적인 변화가 필요함을 깨닫는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를 부인하는 일을 떠맡고자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의 죄가 드러날 때 그들은 분노한다. 그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들을 수 있느냐?’ 하고 수군거리며 예수를 떠나간 제자들처럼, 마음이 상하여 떠나간다.” 시대의 소망, 392.